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조선 후기 목조 건축물 '관월당'이 약 100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왕실 사당으로 추정되는 이 건축물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해외로 옮겨졌던 우리 건축 문화유산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환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앞으로 원위치를 찾고 복원하는 것이 과제로 남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돌아온 관월당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조선 후기 목조 건축물 '관월당(観月堂)'이 약 1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고국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외로 옮겨졌던 우리 건축 문화유산이 이처럼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환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관월당은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대군(大君)급 왕족의 사당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입니다. 단청 등에 사용된 무늬들을 보면 매우 높은 위계를 가진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6월 24일 언론 공개회를 통해 일본 가마쿠라시의 사찰인 고토쿠인(高德院)으로부터 관월당을 기증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6월부터 현지에서 해체 작업을 거쳐 건물의 부재들을 순차적으로 국내로 넘겨받았습니다. 관월당은 1900년대 초 순정효황후(순종의 비)의 아버지인 윤택영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가 막대한 빚을 지면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식산은행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1924년 재정난을 겪던 조선식산은행이 고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야마이치증권 초대 사장인 스기노 기세이에게 관월당을 넘기면서 일본으로 옮겨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경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스기노는 관월당을 도쿄 메구로 자택으로 가져갔다가 폐병에 걸린 뒤 고토쿠인 옆에 별장을 지으며 다시 옮겨 세웠고, 1934년에서 1936년경 고토쿠인에 기증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관월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고토쿠인으로 옮겨진 뒤부터였다고 합니다. 현지에서는 최근까지 관음보살상을 모신 기도처로 활용되었습니다.
왕실 건축의 흔적과 학술적 가치
관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정면을 제외한 모든 칸에 화방벽(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만든 벽)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건물의 구조와 규모는 조선 시대 사묘(祠廟) 양식을 띠고 있어 조선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건물이 오랜 세월 여러 곳을 떠돌면서 구조가 일부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건물의 기단은 일본 가나가와현과 도치기현에서 채석되는 안산암과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하지만 관월당의 기와와 단청에 새겨진 다채로운 무늬들은 이 건물이 조선 왕실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명확히 뒷받침했습니다. 암막새(기와 끝 부분)에는 용과 박쥐 등의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단청에는 구름과 만(卍)자 무늬 등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손현숙 동아시아전통미술연구소장은 단청이 19세기 후반에 다시 채색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채색된 초기 단청과 비교 연구하면 조선 왕실 건축 단청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습니다. 관월당은 조선 왕실 건축의 특징과 시대별 변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환수 과정의 우여곡절과 미래 과제
관월당의 존재는 1990년대부터 학계와 불교계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유산'으로 꾸준히 환수 대상에 거론되었습니다. 2010년에는 양국 불교계가 협의하여 한국으로 돌아올 뻔했지만, 일본 우익 세력의 반발 등으로 논란이 커지면서 아쉽게도 환수가 불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9년, 고토쿠인 주지인 사토 다카오 게이오대 교수(민족학고고학)가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에 "제국주의 시대에 반출된 문화유산의 귀환을 바란다"며 관월당의 기증을 제안하면서 다시 환수 논의가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후 팬데믹으로 인해 시일이 다소 늦어졌지만, 건물 해체 및 이전 비용까지 모두 고토쿠인 측이 부담하는 등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환수가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과거 도쿄 오쿠라 호텔에 있던 경복궁 자선당의 유구(건축물의 잔해)가 반환된 적은 있지만, 건물 전체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돌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의미가 컸습니다. 이제 관월당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원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현재 관월당은 해체된 부재 형태로 경기 파주시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목재 1124점, 석재 및 철물 401점, 기와 3457점 등 총 5000여 점에 달하는 부재들이 순차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보관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관월당의 원래 위치를 찾기 위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 녹지광장'이 된 순정효황후 본가 터(조선식산은행 사택 터)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경아 교수는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조선 왕실과 관련됐다', '도로 확장 사업으로 헐렸다' 등의 내용이 확인되며, 이러한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장소가 현 송현동 부지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외에도 종로구 통의동 일대 창의궁 터나 과거 월궁이라 불렸던 월성위궁 터 등도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향후 수리 및 연구를 거친 뒤 관월당을 원위치로 복원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박형빈 국가유산청 국외유산협력과장은 관월당의 원위치가 밝혀지더라도 현 토지 소유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만약 여의치 않으면 다른 장소에라도 임시 복원하여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관월당의 귀환은 일제강점기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유산 환수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으며, 앞으로 그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이 기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