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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동물원에서 궁궐로의 여정

by gugjinjang1 2025. 7. 8.

창경궁은 조선 시대 궁궐에서 일제강점기 동물원으로 변모했다가 다시 궁궐로 복원된 독특한 역사를 가진 공간입니다. 1909년 개원한 창경원은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사랑받았으며, 특히 봄철 벚꽃놀이와 다양한 동물들이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창경궁의 변천사와 그곳에서 펼쳐진 다양한 이야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동물원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

 

궁궐에서 동물원으로,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으며,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 창경궁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창경궁의 전각들을 대거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건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궁'에서 '원'으로 바뀌었습니다. 1909년 11월 1일 개원한 창경원은 개원과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누구나 입장료만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는 공중을 위한 공간이 되었지만, 이는 조선의 궁궐을 유희시설로 격하시키는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1917년 4월 22일에는 하루에만 무려 1만 2966명이 입장했는데, 이는 당시 서울 인구 25만여 명 대비 5%가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 2~3주일 동안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는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으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창경원의 동물들, 그들의 이야기

창경원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925년 7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코끼리 부부가 들어왔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코끼리 부부는 일곱 살과 여섯 살로, 일본 고베에서 유죽이라는 일본 사람 동물 장사의 중매로 바다를 건너 인천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코끼리 부부가 들어오는 대신, 창경원에 있던 하마 한 마리가 일본 상인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1924년 7월에는 서인도 출신 '사자원숭이' 한 쌍과 젊은 사자 두 마리도 새로 들어왔습니다. 사자원숭이는 얼굴과 꼬리에 사자와 닮은 털이 나 있어 이름 붙여진 동물로, 한 쌍에 150원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새 사자들은 일본 유전 동물원에서 이송된 두 살 된 개체로, 적응에 성공하면 기존의 늙은 사자 두 마리에 1,500원을 더 얹어 교체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창경원 동물원이 항상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1933년 3월 30일에는 호랑이가 우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6세 아이를 할퀴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아이는 평안남도에서 상경한 가족의 아들 김태하로, 어머니와 함께 호랑이를 구경하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어머니 역시 아이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고는 창경원 개원 이래 최초의 중대한 참변이었습니다. 1957년 겨울에는 창경원의 코끼리가 유리문으로 둘러싸인 스팀 난방실 안에서 월동하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겨울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코끼리는 따뜻한 방에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어딘지 쓸쓸하고 추워 보였다고 당시 신문은 전했습니다.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역사의 복원

창경원은 해방 이후에도 한참 동안 서울의 인기 유원지로 역할을 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젊은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했습니다. 밤하늘에 휘날리는 벚꽃과 오색등 반짝이는 조명 아래 춘당지에서 보트를 타는 것이 최고의 데이트 코스였다고 합니다. 1955년 4월에는 미극동지상군 총사령관 테일러 장군이 자신이 기르던 3살 된 수컷 곰 한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기증식에는 미군과 서울시장이 참석했으며, 8군 군악대와 의장병이 동원되어 의식을 장식했습니다. 이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창경원의 재건에 보탬이 되고자 한 기증이었습니다. 이처럼 창경원은 단순한 동물원이 아니었습니다. 궁궐의 과거와 일제의 통치 전략, 그리고 도시민의 일상과 욕망이 얽힌 복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울던 코끼리, 춤추던 홍학, 관람객을 할퀸 호랑이, 겨울을 버티던 동물들의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궁궐로의 회귀, 창경궁의 복원

창경원은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서울의 인기 유원지로서의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동물들을 관람하며 추억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일제강점기 시절 궁궐이 동물원으로 변모했던 아픈 역사를 바로잡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인식의 변화 속에서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창경궁 복원 계획을 공식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물 복원을 넘어,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던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복원 계획에 따라 창경원에 있던 동물들은 서울대공원으로 이관되기 시작했고, 유원지 시설물들도 철거되었습니다. 수년에 걸친 복원 작업 끝에, 1986년 8월 23일 창경원은 마침내 본래의 이름인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동물원과 식물원의 흔적을 지우고, 조선 시대 궁궐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되찾는 대대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이는 77년간 이어진 창경원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잃어버렸던 궁궐의 정체성을 되찾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창경궁의 복원은 단순히 건물을 다시 짓는 것을 넘어,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창경궁은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름다운 궁궐로서 시민들에게 휴식과 역사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궁궐에서 동물원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창경궁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되새기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